이 편지에 감동하는 우리들 정서의 순수함을 비판할 뜻은 없지만, 사실 이런 현상 자체는 굉장히 섬뜩한 현상이다.
너무도 유명한 케네디 연설문의 바로 이 대목,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이 한마디가 오늘날의 공익성을 관통하는 이념이다. 이 한마디가, 이 이념이 쉽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파고들 수 있었던 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너무도 숭고하게만 보이는 가치를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수사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동전의 한면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고, 사람들이 동전의 이쪽면에 너무나 감탄한 나머지 이 동전의 반대쪽면에 무엇이 있나 볼 생각을 안 한다는 데에 있다.
대추리 사태와도 연관하여 요며칠 반복적으로 하는 이야기지만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숭고한만큼이나 그 숭고함의 무게가 짓누르는 ‘희생의 강요’로부터 개인이 자유로와지기란 무척 어렵다. 그래서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대단히 폭력적인 양상을 띈다.
SK 사장이 썼다는 저 편지는 훨씬 장황하지만 케네디 연설문과 아주 동일한 구조를 지닌다. 한마디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And so, my employees (and their families): ask not what your company can do for you–aks what you can do for your company.’
그런데, SK 사장님, 말씀은 저렇게 해도, 그분 머릿속에는 ‘your company’가 ‘my company’로 치환돼 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감쪽같이 속는다, 제길. SK 사장 정도 되면 수완이 보통이 아닌 건 틀림없다. (아이에게도 존대를 쓰는 반듯한 어른의 품위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라.)
게다가 정작 이런 수사를 즐겨 사용하는 지배계급은 다른 이들ㅡ피지배계급ㅡ의 희생의 단맛을 즐길줄만 알 뿐 실제로 다수ㅡ피지배계급ㅡ를 위해 자기 희생을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논리는 그래서 현실세계에서는 소수를 위한 다수의 희생으로 나타난다. 정 못 믿겠다면 사장님한테 이 한마디 해봐라, 무슨 말씀을 하시나.
사장님, 정말 준현이를 아낀다면 사장님 허리띠 조금만 더 조르시고 준현이 아버지 퇴근 좀 일찍 시켜주시죠.
이하는 친구가 이 편지를 자기 홈피에 퍼오면서 이에 대해 쓴 글 »
이 글은 이 회사를 다니고 있는 지인들의 미니홈피에 스크랩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용만 긁어온 것이다. 사실 그 미니홈피에는 “너 회사 정말 잘 갔다~”등의 칭찬과 감동의 리플 일색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읽고 착잡한 심정만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사장님이 보냈다는 편지와 학용품, 아이들에게는 아빠와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얼굴을 마주보고 얘기할 수 있는 시간과 맞바꿀 수 있을만큼 가치있는 것일까?
이 깜짝 이벤트에 감동을 받고, 이제는 느슨해질 것 같으면 남편을 더 채찍질하겠다고까지 하는 아내 역시, 앞으로도 걸핏하면 피곤에 절어 늦게 들어오는 남편에게 유통기한 몇일짜리 이해심을 발휘한단 말인가?
과연 이 아이들과 아내는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걸까…. 어느날 아빠들은 어느 날인가 술고래가 되어 들어와, ‘내가 돈이나 벌어오는 기계야!!’하고 애꿎은 아내에게 빽! 갑자기 소리지르게 만드는 것이 정녕 그 앞에 있는 그의 아내가 반성해야만 하는 일인가.
우리는 상품 뿐 아니라 문화, 폭력까지도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소비자에게 보여주는 친절과 미소 뒤에 냉혹함과 이윤추구 그리고 폭력성이 감추어져있다고 주장한 보드리야르를,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물론, 디자인 이론을 조금이라도 관심있게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들어봤을 이름이다. 그런데 그의 스승, 앙리 르페브르의 책을 읽다보면, 보드리야르의 이론의 원형이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친절하고 이로운 사회’ (앙리 르페브르에 의하면)는 ,
“당신에게 항상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며 무슨옷을 입고 무슨 가구를 들여놓으며, 어떻게 살 것인지 말해준다. 그런 식으로 당신은 프로그래밍 되는 것이다. 친절하고 이로운 회사 전체가 당신 곁에 있다. 아 주 주의 깊은 모습으로, 회사는 개인적으로 당신을 생각해준다. 아주 친밀하게, 회사는 당신을 위해 특별히 개인적인 물품을 준비하고, 이 개인적인 물품들은 안락의자, 부품조립, 침대시트,속옷같은 생활용품의 자격으로 당신의 개인적인 자유에 양도된다.
그 런데 우리는 회사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회사란 누구인가? 그것은 어머니요, 형제다. 눈에 보이는 현실 속의 가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훨씬 효율적이고 우수한 이 가정 (회사), 즉 그 보호자적 매력과 세심한 보살핌으로 우리들 각자를 감싸주고 있는 이 소비의 사회와 두 겹으 한 짝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 가족이 감히 불안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무슨 배은망덕이겠느냐 말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회사원들을 ‘이 배은망덕 놈 같으니라구!’같은 소리나 들을 신세로 만들어버리는 사회에 조종당하고 눈치보는 현대인들, 그 밑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다.
저 위에 SK 사장님이 친히 쓰셨다는 편지(사실여부는 모르는거지만)와 그에 감동했다던 어느 아내의 글과 그에 동감하는 끝없이 달리는 수많은 리플들을 보면서,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등골에서부터 좌악- 올라오기 시작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나면, 나도 저기로 뛰어들어야 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뛰어봤자 벼룩이라, 나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별반 다를게 없는 이 매트릭스의 배터리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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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 응. :p 사실 그렇잖아도 ‘의심하고 분노하라’는 요지로 몇자 끄적여볼 참이었는데, 이거 왠지 새치기 당한 느낌. ㅡㅠㅡ